조선의 시인. 자는 여경. 호는 조총ㆍ광진자. 본관은 남양. 가세는 대대로 청빈하였으나 성질이 방 달하여 얽매이지를 않았다.
남양 태수가 그의 문장에 능한 것을 보고 이역을 면제시켰다. 이어 김종직에게서 공부했고 추 강 남효온과 함께 세속에서 벗어나 산과 물을 찾아 시주로 세월을 보내었다. 당시의 명류 김 수온ㆍ김시습 등과 교유하며 시율로 화합하여 이름을 떨쳤고, 당시의 명공ㆍ거경들이 다투어 교유하기를 원하였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 잡혀 들어가 국문을 당하고 제주에 유배되어 노예가 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 후 풀려 나왔다. 76세에 처음으로 아내를 맞아 한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지성이라 했다.
조선조의 사내아이는 보통 10세를 넘으면 장가를 가게 되는데, 무려 76세의 죽을 나이에 첫 장가를 가고 아이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본인은 홍유손으로 그는 소위 죽림칠현으로 속세를 떠난 청담파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76세에 장가를 들어 아들 지성을 낳고 99세까지 살다간 조선 시대 기인 중의 한 명이다. 같은 죽림칠현이자 생육신이었던 남효온은 그를 평해 [글은 칠원 같고 시는 산골짜기를 누빈다] 고 하였다.
그는 거의 기인에 가까웠으며 특히 세조가 정권을 잡은 후 김시습, 남효온 등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비관하고 냉소로 일관하면서 풍자적인 인생을 살았다.
99세의 천수를 누린 그는 역사 인물사 전에 나오는 최장수 인물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