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했던 민주당 대권후보 경선
2002년 새천년민주당은 최초로 지금까지 당원들만이 참여했던 대통령선거 후보경선을, 국민 참여 경선으로 바꾸었다.
당원 대 일반국민의 비율을 50:50으로 하여 2002년 3~4월 동안 각 광역자치단체를 순회하여 선거를 하는 방식으로 국민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았으며, 그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를 만들어내면서 최고의 흥행을 끌어내었다.
초반에는 이인제가 무난히 승리하리라는 관측 속에 정권의 신주류인 김중권, 전통적인 주류 인사 한화갑, MBC 앵커 출신 소장파 정동영이 뒤를 이었다.
경선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근태가 자신이 정권 실세였던 ‘권노갑 의원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양심선언을 하면서 권노갑의 지원을 받던 이인제의 조직이 위축되어 버린다.
첫 경선지역인 제주도에서는 한화갑 175표로 1위, 이인제가 172표로 2위, 노무현, 정동영이 3위와 4위권을 이룬다.
두 번째 울산광역시에서는 영남 후보론을 외치는 노무현, 김중권 두 영남권 후보가 1, 2위를 기록했고, 이인제가 3위로 따라붙었다. 이 경선이 끝난 직후 김근태, 유종근 후보가 사퇴한다.
세 번째 광주광역시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노무현이 1위라는 대이변을 일으키는데, 광주 경선 직전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vs 이회창 양자 구도에서 노무현의 지지율이 앞선 것이 허상이 아님을 입증한다.
네 번째 대전광역시에서 이인제가 노무현에 비해 4~5배의 득표율의 큰 표차이로 1위를 거두고 한화갑은 후보를 사퇴한다.
다섯 번째 충청남도에서도 이인제가 압승을 거두며 총 득표수에서도 다시 1위로 앞서나간다.
여섯 번째 경선지역은 ‘노풍’을 ‘노무현 돌풍’으로 만드는 분수령이 되는 강원도로써, 노무현이 630표로 이인제의 623표를 7표 차이로 제친 것인데, 강원 경선 직후 같은 영남권 후보인 김중권이 사퇴를 선언하면서 노풍은 더욱 거세어진다.
이후의 경선은 커다란 이변은 없었지만 보고 즐기는 재미는 충분했다.
경상남도,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등 영남지역에서 노무현은 이인제를 두 배 이상의 차이로 누르고 1위를 차지했으며, 인천광역시와 정동영의 지지기반인 전라북도에서도 노무현은 근소한 차이지만 계속 1위를 거둔다.
12번째 지역 충청북도에서 이인제가 1위를 거두었지만 13번째 지역 전라남도에서 노무현이 워낙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차지하자, 이인제는 사퇴를 하고 훗날 속칭 ‘피닉제’라는 개그의 소재로 전락한다.
경기도에서는 끝까지 완주하며 민주당 경선 흥행을 유지시켜준 정동영 후보가 1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부산광역시와 서울특별시에서 크게 앞서며 경선은 막을 내린다.
2002년 4월 27일. 서울 경선 직후 노무현 후보가 공식적으로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가 되었고, 후보 수락연설을 하던 자리에서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 라는 노래를 부른다.
이 때의 영상을 찾아보면 노무현은 아마 청문회 스타가 된 이후에 오히려 마음이 아팠을 그 시절을 기억하는 것인지 ‘타는 목마름으로’를 ‘타는 목마름’으로 부른 듯하다.
이회창의 압승으로 끝난 한나라당 경선
한나라당에서도 새천년민주당과 같은 국민 참여 경선제도를 도입했고, 후보로는 이회창, 최병렬, 이상희, 이부영이 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의 대선에 한번 도전해봤던 경험, 당 대표를 맡은 이후 당 개혁을 주도했던 경력, 대쪽 판사, 대쪽 총리 등 굳건한 스펙으로 이미 대선 후보로 사실상 내정되었던 분위기였고 다른 후보들이 도전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실제로 울산에서 최병렬에게 근소하게 진 것과 호남지역에서 이부영과의 격차가 두 배 정도인 것을 빼면 모든 지역에서 최소 세 배 이상의 차이로 압승을 거두었다.
양당의 경선이 끝나고 6월 13일 실시된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노풍이 강하게 불면서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10-20% 이상의 격차로 승리하는 여론조사가 많았기에, 새천년 민주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지만 야당인 한나라당이 압승하고, 곧 이은 8.8 재보선에서도 새천년민주당이 패배하면서 이회창은 승기를 잡아 나간다.
하지만 이 선거 직후에 월드컵 보느라 저조한 투표율을 보면서, 젊은 세대의 투표참여율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일어난다.
이 시기에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김홍일 의원이 구속 되는 등 한나라당의 인기가 다시 오르게 되니. 노무현이 비록 드라마틱한 삶의 경력과 경선과정을 거치며 노풍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탄탄한 당내 기반을 갖춘 이회창의 당선을 기정사실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2002 한일월드컵과 젊은세대의 자신감
1989년 일본이 첫 월드컵 아시아 개최를 목표로 월드컵 조직위를 결성했고 일본에 자극을 받은 대한민국은 1994년이 되서야 월드컵 조직위를 결성하고, 1995년에 일본과 함께 두 나라만이 FIFA 월드컵 개최 제안서를 제출한다.
당시 FIFA는 일본과 사이가 가까운 브라질의 주앙 아벨란제가 회장을 맡고 있었으며 펠레가 앞장서서 일본의 개최를 주장하자, 그 꼴이 보기 싫었는지 마라도나는 한국편을 들고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마라도나 공식 재기전에 출전하여 한국을 홍보하고, 스웨덴의 레나르트 요한손 UEFA 회장도 이에 가세한다.
축구대륙 남미에서 브라질이 일본에 붙자 브라질을 싫어하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한국에 붙고, 아르헨티나를 싫어하는 칠레가 일본에 붙자 칠레를 싫어하는 페루와 볼리비아가 한국에 붙었으며 볼리비아를 싫어하는 파라과이는 일본에 붙었다.
한국 : 스웨덴 레나르트 요한손 UEFA 회장, 마라도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페루, 볼리비아
일본 : 브라질 주앙 아벨란제 FIFA 회장, 펠레, 칠레, 파라과이
뭐 이런 식으로 때 아닌 감정대결이 벌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공동으로 월드컵을 개최하게 되고, 2002년은 대한민국을 뒤덮었던 월드컵 열기의 시초이자 우리나라 축구 역사의 황금기를 누리며, ‘붉은악마’에 의해 “꿈은 이루어진다” “대한민국” ‘짜작짝 짝짝’ 구호가 탄생하여 세계 응원사에 거대한 획을 긋게 된다.
2002 월드컵 기간에 시청앞 광장을 가득 메우며 나타난 엄청난 열기와, 붉은악마로 대표되는, ‘우리도 할 수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젊은세대의 자신감, 그리고 인터넷의 위력은 16대 대통령선거에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제16대 대통령선거과정
대선사상 최초로 도입된 국민 참여경선과 여론조사 반영을 통한 대통령 후보 선출로 이회창과 노무현이 양당의 후보가 된다,
경선과정에서 발생한 ‘노풍’이 민심을 술렁이게 만든다.
경선 직후 실시된 지방 선거와 재보궐선거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이 압승하며 분위기를 가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