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비수로 돌아온 조선의 ‘적폐 기술’
  • 김태구
  • 등록 2021-02-25 14:10:49

기사수정

비수로 돌아온 조선의 ‘적폐 기술’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이렇게 썼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꼭 인연만일까. 손에 들어온 기회를 기회인지조차 모르고 놓친 뒤 오히려 당하는 어리석음을 역사는 기록한다. 


1543년, 일본 규슈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의 도주 도키타가(時堯)는 표착한 중국 상선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선원으로부터 머스킷(화승총) 두 자루를 샀다. 대가는 은 2000냥. 지금 가치로 치면 대략 20억원이다. 당시 물가 수준으로 병사 200명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돈이다. 변방의 도주는 어떻게 이런 많은 은을 갖고 있었을까. 


그 궁금증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조선에서 유출된 첨단 제련술을 만난다. 연은(鉛銀)분리술. 광석에 섞여 있는 납과 은의 녹는 점 차이를 이용한 획기적 기술이다. 함경도 단천 광산에서 일하던 양인 김감불과 노비 김검동이 개발해 연산군 앞에서 시연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산의 관심은 은으로 살 수 있는 명나라 비단에 있었겠지만, 아무튼 이 기술은 한때 조선을 은 생산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반정에 성공한 중종 세력에게 이 기술은 사치와 향락을 조장하는 ‘적폐’일 뿐이었다. 사치 근절과 농업 장려라는 명분 속에 단천 광산은 폐쇄됐고(1516년), 신기술은 설 곳이 사라졌다. 


단천 광산 폐쇄 17년 뒤, 길 잃은 조선의 제련술을 반긴 곳은 일본 이와미(石見) 은광이었다. 조선에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는 두 명의 기술자가 새 제련술을 선보였다. 변변찮던 이와미는 순식간에 세계 2위 은광이 됐고, 일본은 은이 넘쳐나는 나라가 됐다. 적폐로 몰려 쫓겨난 조선의 기술이 아니었다면 변방의 도주 손에 들려 있던 은 2000냥은 없었을지 모른다. 49년 후, 복제와 개량을 거듭한 두 자루의 머스킷은 ‘조총’으로 바뀌어 조선의 심장을 겨냥했다. 


500년 전 역사는 한국형 원전 기술 유출 논란을 계기로 현재와 오버랩된다. 원전 운영 진단 프로그램인 ‘냅스’(NAPS)라는 첨단 기술이 UAE와 미국 회사로 빼돌려졌다는 의혹이다. ‘탈원전’ 탓 아니냐는 의구심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극구 부인한다. 내부 절차에 따른 정당한 기술 수출이었고, 산업스파이로 의심받는 간부의 이직도 현 정부 출범 이전 일이라는 것이다. 


의혹은 수사를 통해 밝혀질 일이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의 원전 기술이 한국 땅에서 점점 자리를 잃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지난해 한수원•한전기술•한전KPS 등 원자력 관련 공기업 3사에서 제 발로 나간 인원이 144명이다. 탈원전 정책 시작 전인 2015년의 두 배 수준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해외 원전 기업으로 이직했다. 이들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 다 기술이요, 노하우다. 싹수 노란 가능성에 매달릴 후진들도 없다. 서울대의 한 원자력 교수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연구실이 늘 떠들썩했는데, 요즘은 적막강산"이라고 하소연했다. 50년 쌓아온 원전 생태계가 무너지는 현장이다. 


이런 풍경이 어디 원전뿐인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제철소는 ‘환경 적폐’ 오명 속에 조업정지를 당할 판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문제삼지 않는 고로 정비 방식이 유독 한국에선 문제가 됐다. ‘4대강 적폐 청산’ 구호는 기어코 보(洑)를 허물겠다는 기세다. 거금을 들여 개발한 해외 광산은 ‘자원 외교 적폐’ 딱지가 붙여진 채 헐값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게 구정물이고, 어떤 게 아기인지 구분하려는 생각은 하기나 하는지 의심스럽다. 


조선의 손에 잡혔던 기회를 발로 차버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돈과 살길을 쫓아 기술을 팔아먹은 ‘배신자’에 있는가, 세상과 시대 흐름에 눈 귀 막은 어리석은 위정(爲政)에 있는가. 구정물과 함께 버려진 아기는 21세기 경제 전쟁에서 어떤 조총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가장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스타필드 빌리지" 파주 운정신도시에 첫선...서울 서래마을 인기 베이커리 카페 ‘아티장베이커스’ 개점 [뉴스21 통신=추현욱 ] 스타필드 빌리지가 파주 운정신도시에 첫선을 보였다.3일 가오픈한 운정점 내부는 파주 시민들의 기대감을 반영하듯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아이를 둔 젊은 부부가 많이 거주하는 만큼 유모차를 끌고 방문한 고객이 대다수였다. 반려견과 찾은 고객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실제 운정점은 기존 스타필드와 달리 아이 .
  2. 강동구 복지단체 - 취임식과 송년회를 성황리에 마치다 지난 12월1일(월) 강동융복합복지네트워크 [김근희총회장 취임식 및 송년회]가 만나하우스에서 성황리에 치루어졌다. 식전행사로 김희옥(전.송파구립합창단원)의 ‘님이오시는지. 에델바이스’와 최주희가수의 ‘백년살이’ 열창에 이어 손재용 수석부회장의 개회 선언으로 시작된 이 날 행사엔 강동구 이수희구청장. 조동탁구...
  3. 수차례 신고에도 처벌 ‘0’…충주노동청, 위험 방치한 채 사실상 현장 편들기 산업현장에서 낙하물 방지망 미설치라는 중대한 법 위반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충주고용노동지청이 수차례의 신고를 모두 ‘행정지도’로만 뭉개 온 사실이 드러나 직무유기 논란이 본격화되고 있다.최근 한 제보자는 충주지청에 낙하물 방지막 미설치를 신고했지만, 충주지청은 국민신문고 답변에서 “이번뿐 아니라 과거 신고 ...
  4. 민주당, '정년연장+재고용' 방식은…적용시기·연장폭이 관건 [뉴스21 통신=추현욱 ]법정정년 문제를 놓고 여당이 정년연장과 퇴직 후 재고용 방식을 결합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가운데, 법정정년을 단계적으로 연장하되 연장 혜택을 보지 못하는 연령대엔 재고용 의무화를 부여하는 방식을 검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노사가 참여하는 더불어민주당 정년연장특위는 이 같은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현행 ...
  5. 행안위, '제헌절' 법정 공휴일 재지정 추진... [뉴스21 통신=추현욱 ]제헌절의 18년 만의 법정 공휴일 재지정이 추진되면서, 내년 7월 17일이 다시 '빨간날'이 될 경우 여름철 성수기 연속 3일 연휴를 기대하는 직장인들의 관심도 함께 커지고 있다.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27일 '공휴일에 관한 법률(공휴일법)' 개정안을 의결하며, 제헌절을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절차에 돌입했.
  6. 양주시, 바르게살기운동 백석읍위원회, 주민 참여 수익사업으로 마련한 기부금 200만 원 전달 바르게살기운동 백석읍위원회가 지난 1일, 자체 수익사업을 통해 조성한 현금 200만 원을 백석읍에 기부했다고 밝혔다.이번 기부금은 위원회가 지역 주민들과 함께 레몬청과 티백을 판매하며 마련한 것으로, 주민들이 정성껏 만든 상품을 직접 판매하며 나눔의 의미를 더했다. 특히 이번 수익사업은 지역경제 활성화와 주민 교류 확대에도 ..
  7. 울주군보건소, 정신재활시설 좋은친구들 그림책 전시회 개최 ▲사진제공:울주군청 울주군보건소가 지역 정신재활시설인 ‘좋은친구들’이 5일 남구 민간 전시공간에서 정신장애인이 만든 그림책 전시회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좋은친구들은 울주군보건소의 지원을 받아 정신장애인의 사회적응력 향상과 창의적 여가활동을 위한 ‘In My Book:마음 엮어 책한권(그림책 창작 프로그램)’을 운.
역사왜곡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