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의왕시 사근행궁, 의로운 왕의 도시가 잊지 말아야 할 자리
  • 홍판곤
  • 등록 2025-10-22 19:34:58

기사수정
  • 표식만 남은 터, 시민의 역사 의식이 정조의 뜻을 다시 세운다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행길에 오르내리며 잠시 머물렀던 사근행궁터가 대단위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면서 역사복원의 마지막 기회를 맞고 있다.일제강점기와 도시개발을 거치며 원형은 사라졌지만.표식과 사료, 그리고 공간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있다. 문화재조사를 기관에 의뢰, 선결했다지만 재개발 공사가 본격화되면 유구와 유물조사와 보존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재개발 고천나지구 현재 전경

[뉴스21 통신=홍판곤 ]

정조는 '의로운 왕(義王)'이었다. 그는 백성을 사랑했고, 아버지를 그리워했으며, 무너진 나라의 기강을 세우려 했다. 사근행궁에 들렀을 때마다 마음속에 품었던 건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배알하고, 백성을 돌보는 그 길이 곧 임금의 도리다."


그 길 위에 오늘의 의왕(義王)이 있다. 그러나 지금, 그 이름의 도시가 한 왕의 뜻을 잊은 채 역사를 표식 하나로만 남겨두려 하고 있다.


사근행궁 터와 3.1운동 기념지 표식

사근행궁터는 현재 고천재개발 구역 내 2,413㎡ 부지에 포함돼 있다. 건물이 없는 공지 상태인 이곳은 2025년 11월 착공을 앞두고 있으며, 분양은 같은 해 11월 중순 이후로 계획돼 있다.

고천지구 재개발조합 김학권 조합장은 "해당 구역 내 역사적 의미를 존중해 행궁터 표식은 남기겠다"고 밝혔지만, 복원은 고려되지 않은 상태다. 당초 공원형 제공 방식으로 진행돼, 그 자리에는 오직 '사근행궁터' 표석 하나만이 역사를 대신할 예정이다.


의왕문화원 부설 지역문화연구소 박철하 소장은 이미 3년 전부터 조합과 복원 필요성을 협의해왔다. 당시에는 행궁의 원위치 복원과 기념공간 조성 논의가 오갔으나, 사업 추진 과정에서 복원안은 빠지고 '표식 보존'만 남는 방향으로 정리됐다. 박 소장은 "행궁은 단순한 표식으로 남을 곳이 아니다. 정조의 효심과 애민정신, 그리고 지역 정체성을 함께 품은 도시의 뿌리이자 기억의 장소"라고 강조한다. 그의 말처럼, 사근행궁 복원은 단순한 건축 재현이 아니라 '의왕'이라는 도시명에 담긴 정신의 복원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의왕시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의곡면(義谷面)과 왕륜면(旺倫面)이 통합되며 '의왕면(義旺面)'으로 새로 명명된 것이 기원이다. 표면적으로는 행정명칭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이 이름이 단순한 우연은 아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정조대왕의 능행로가 통과하던 길목이었고, 사근행궁이라는 정조의 효심과 애민의 공간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가 이 땅에 머물며 보여준 의로운 통치, 백성을 향한 마음은 오늘의 도시 이름 '의왕(義王)'에 다시 새겨지고 있다.


즉, '의왕'이 정조의 시호에서 직접 유래한 것은 아니지만, 정조의 정신이 남긴 역사적 필연이 만들어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지명은 우연이 아니라, 땅이 스스로 기억을 품어낸 결과인 셈이다.


사근행궁의 복원은 공상적 구상이 아니다. 1795년의 『원행을묘정리의궤』, 정조의 능행 행렬도를 그린 「시흥환어행렬도」, 1847년 편찬된 『남한지(南漢誌)』, 1937년 일왕면협의회 회의록 등 행궁의 위치·규모·건물 형태를 입증하는 사료가 명확히 남아 있다. 


이 기록들은 복원의 구체적 근거이며, 정조의 뜻을 온전히 되살리는 일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단순히 건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공간의 의미를 되살리는 일이기에, 사근행궁은 충분히 복원이 가능한 유적이다.


불과 35년 전, 수원도 의왕과 다르지 않았다.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잊힌 화성행궁은 한때 '복원 불가'로 평가받았다. 1923년, 일제가 자혜의원(慈惠醫院)을 신축하면서 행궁 본전(봉수당 등)이 철거·멸실됐고, 그 뒤로 행궁은 60여 년간 잊혀졌다. 그러나 시민의 참여와 학계의 고증, 행정의 결단이 모이며 1989년 첫 삽이 뜨고, 1923년 멸실 이후 정확히 101년 만인 2024년 완전 복원 준공식이 열렸다. 그곳에는 '정조의 꿈'을 함께 일으킨 수원 시민의 자부심이 있었다. 화성행궁의 복원은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기억을 이어가는 시민 의지의 기념비였다.


'시흥 환어행렬도' 속 사근행궁 구조 도해 및 관련 문헌

정조대왕 행렬_사근행궁을 배경으로 그려진 장면

'의왕(義王)'은 단지 한 왕의 이름이 아니다. 백성을 위하고, 예를 다한 통치의 정신이다. 그 정신이 이 땅의 이름에 남아 있다면, 이제 그 뜻을 실천하는 일은 우리 시민의 몫이다. 사근행궁은 단지 정조의 머묾이 아니라 왕과 백성, 그리고 나라를 잇는 마음의 자리였다. 그 터를 보존하고 복원하는 일은 '의로운 왕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은 역사적 책임이자 도덕적 실천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행정 절차나 예산보다 역사 인식이 있는 시민의 움직임이다. 자신이 사는 도시의 뿌리를 알고, 그 기억을 다음 세대에 잇는 양식 있는 시민들의 연대가 절실하다. 정조가 남긴 '사근(肆覲)'의 정신—예를 갖춰 아버지를 뵙고, 백성을 품던 그 마음은 이제 의왕 시민의 손끝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날, 사근행궁은 더 이상 표석이 아니라 '의로운 왕의 도시'를 상징하는 산 역사가 될 것이다.

 

[자료 협조]박철하 의왕문화원 부설 지역문화연구소장 / 김학권 고천나지구재개발조합 조합장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가장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스타필드 빌리지" 파주 운정신도시에 첫선...서울 서래마을 인기 베이커리 카페 ‘아티장베이커스’ 개점 [뉴스21 통신=추현욱 ] 스타필드 빌리지가 파주 운정신도시에 첫선을 보였다.3일 가오픈한 운정점 내부는 파주 시민들의 기대감을 반영하듯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아이를 둔 젊은 부부가 많이 거주하는 만큼 유모차를 끌고 방문한 고객이 대다수였다. 반려견과 찾은 고객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실제 운정점은 기존 스타필드와 달리 아이 .
  2. 제천 제일장례예식장, ‘지목 전(田)’에 수년간 불법 아스팔트… 제천시는 뒤늦은 원상복구 명령 충북 제천시 천남동에 있는 제일 장례예식장이 지목이 ‘전(田)’인 토지에 십수 년 동안 무단으로 아스팔트 포장하고 주차장으로 운영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명백한 불법 행위가 십수 년 동안 방치된 가운데, 제천시는 최근에서야 현장 확인 후 원상복구 명령을 내렸다.문제의 부지(천남동 471-31 등)는 농지 지목인 ‘전’으로, ...
  3. 강동구 복지단체 - 취임식과 송년회를 성황리에 마치다 지난 12월1일(월) 강동융복합복지네트워크 [김근희총회장 취임식 및 송년회]가 만나하우스에서 성황리에 치루어졌다. 식전행사로 김희옥(전.송파구립합창단원)의 ‘님이오시는지. 에델바이스’와 최주희가수의 ‘백년살이’ 열창에 이어 손재용 수석부회장의 개회 선언으로 시작된 이 날 행사엔 강동구 이수희구청장. 조동탁구...
  4. 제천경찰, “술 마시고 운전하면 끝까지 잡는다”… 연말연시 ‘전방위 초강도 음주단속’ 돌입 충북 제천경찰서가 연말연시 음주운전 사고 위험이 커지는 시기를 맞아 내년 1월까지 사실상 ‘전면전 수준’의 초강도 음주운전 단속을 시행한다.경찰은 3일 “제천 전역에서 시간·장소 불문 불시 단속한다”며 “연말 분위기에 기대 운전대를 잡는 어떤 음주 운전자도 예외 없이 적발하겠다”고 강한 경고를 보냈...
  5. 삼동면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취약계층 김장김치 지원 ▲사진제공:울주군청 울주군 삼동면 지역사회보장협의체(공동위원장 한상준, 박두진)가 5일 지역 내 취약계층 가구 70세대에 김장김치를 전달했다.이날 협의체 위원들은 지난 8월에 직접 심어 수확한 배추로 김장김치를 담갔다. 이어 대상 세대를 방문해 김장김치를 전달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했다.한상준 위원장은 “이번 사업이 물가 ...
  6. 울주군보건소, 정신재활시설 좋은친구들 그림책 전시회 개최 ▲사진제공:울주군청 울주군보건소가 지역 정신재활시설인 ‘좋은친구들’이 5일 남구 민간 전시공간에서 정신장애인이 만든 그림책 전시회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좋은친구들은 울주군보건소의 지원을 받아 정신장애인의 사회적응력 향상과 창의적 여가활동을 위한 ‘In My Book:마음 엮어 책한권(그림책 창작 프로그램)’을 운.
  7. S-OIL, 온산읍 취약계층 지원금 5천만원 전달 ▲사진제공:울주군청 S-OIL 울산공장이 5일 울주군 온산읍 행정복지센터에서 이준호 온산읍장, 박성훈 S-OIL 상무, 박광철 온산읍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장, 양호영 울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온산읍 취약계층 지원금 5천만원을 전달했다. 이번 지원금은 온산읍 내 복지위기가구 및 저소득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
역사왜곡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