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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선거 - 제7대 - <마타도어> 이회두 본부장
  • 기사등록 2017-04-03 18:13:27
  • 수정 2017-04-29 16: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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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교육헌장을 외워라

5대에서는 간신히 당선되었지만 6대에서는 상당한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6년째 대통령직에 있던 박정희가 정권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정황이 나타나게 되는데, 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196759일 국무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 공무원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의 선거법 시행령 개정을 의결한 것이 그 한 단면이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여당을 지원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행위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윤보선이 야당 후보 지원 유세에서 "박 정권은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의 3차 중임을 위한 개헌선을 확보하려고 헌법 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압력을 가하는 등 또 다른 부정 선거를 꾀하고 있다"는 말로 설명이 된다.

때마침 19681월 이른바 북한의 민족보위성 정찰국 특수부대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요인 암살을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청와대 근처까지 잠입하는 김신조 사건(1.21 사태)이 발생한다.




이틀 후 북한 해안에서 40떨어진 동해의 공해상에서 승무원 83명을 태우고 임무를 수행하던 미국 함정 푸에블로호가 북한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에 의해 나포되는 사건도 일어난다.

김신조 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연이어 벌어진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과 통일혁명당 사건의 주모자인 김종태가 4회에 걸쳐 월북한 사실이 밝혀지고 KAL기 납북 사건이 터지는 등 일련의 사건들이 불안해하는 국민들을 '반공'이란 국시 앞에 뭉치게 했다.

반공의 국시는 국가안보와 조국 근대화를 명분으로 내세운 삼선개헌안을 공론화하는 계기가 되고,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은 이 틈에 발표되어 모든 국민들에게 암기시킨 국민교육헌장 내용에서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과업을 인용해 3선 개헌의 필요성을 공식화 했다.

4.8항명, 김종필 계파를 몰아내다




김신조 사건 이듬해인 1969년 4월 7일, 국회를 경시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권오병 문교부장관에 대해 국회 본회의에서 신민당 원내 총무 김영삼 외 35 명이 문교부 장관 권오병에 대한 해임 권고 건의안을 발의한다.


박정희가 해임안을 부결하라는 당명을 내림에도 불구하고 해임안이 가결이 되어 버리는 이른 바 4.8항명이 벌어진다. 이를 권장관에 대한 반감이라기 보다 3선개헌에 반대하는 행동으로 읽은 박정희는, 중정을 통해 반대자 색출에 나서고 JP계 의원 5명을 제명하는 등 국회의원들을 공포 속에 단도리 해버린다.


이 후 공화당이 신민당의 반대에도 아랑곳 않고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야당의원들이 국회의사당 점거하지만 공화당 의원들은 9월 14일 새벽 2시, 본회의장 길 건너편에 위치한 별관에 다시 모여 단 몇 분 만에 안건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때 국회의장 이효상은 의사봉을 준비하지 못해 국회 직원이 가져다준 물건으로 세 번 책상을 쳐서 안건을 통과시키게 되는데 이 물건은 바로 주전자 뚜껑이다.


그 후 개헌안은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총유권자 77.1% 참여, 65.1% 찬성을 얻어 확정되었고 이로써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


이승만 시절 초대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로 빚어진 참극에서 보듯 정권에 대한 욕망은 한이 없는 것인지, 박정희도 자신의 군사정권에 의해 이루어진 5차 개헌 안에 있던 대통령 3선제한 조항을 스스로 폐기한 것이다.


대통령 후보 지명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한 김영삼


1969년 11월 8일 삼선 개헌 반대 투쟁을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당시 김영삼(당시 42세) 원내총무가 세대교체를 주장하며 71년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한다.


1969년 12월 김윤환이 사십대들의 붐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김대중에게 접근하여 세대교체 운동에 동참하기를 요구하지만 김대중은 자신의 목표는 75년 대통령 선거라며 지명전 경쟁선언을 거부한다.


1970년 1월 24일 김대중(당시 44세)은 뉴 서울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서겠다고 밝힌다.


1970년 1월 25일 신민당은 대통령 후보는 6월중 선출하고 총재 경선만 실시하기로 합의를 보고 유진산이 당수로 선출된 가운데 2월 12일 이철승(당시 47세)도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설 것을 선언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신민당 전당대회는 9월로 연기된다.


1970년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된 전당대회 당일 투표 전 이철승은 신상발언을 통해 김영삼을 밀겠다는 서약 이행을 선언할 예정이었으나 신상발언이 봉쇄되고 결국 격분한 이철승 계 대의원들은 모두 백지투표를 하고 만다.


-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4표, 과반수인 443표 득표자가 없자 결선투표를 위해 40분간의 휴회가 선포 -


휴회 시간 중 김대중은 그 자리에서 당권과 대권의 분리 아울러 이철승에게 당권을 넘기겠다는 내용을 자신의 명함에 적어 서명을 하여 김대중의 참모 조영하에게 건네주었다.


2차 투표결과 김대중 458표, 김영삼은 410표, 기타 18표로 김대중이 과반수에서 12표를 넘어 당선된다.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로 선출되자 구민주당 구파 출신들인 윤보선, 장준하, 박기출 등은 후일 신민당을 탈당하는 등 반발하지만 김영삼은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고 신민당에 남아 김대중의 유세를 다니며 김대중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고 화끈하게 밀어준다.

난항을 겪기는 했으나 신민당의 김대중은 1970929일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면서 당시 대한민국에 불어 닥친 사십대 기수론이라는 전국적인 거센 돌풍, 거기에 더하여 경선에 참여했던 김영삼과 이철승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일찌감치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7대 대통령 선거결과

1971427일 실시되며 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신민당의 김대중, 국민당의 박기출, 자민당의 이종윤, 정의당의 진복기, 통사당의 김철, 민중당의 성보경의 일곱 명의 후보가 난립했으나 김철 후보와 성보경 후보는 중도 사퇴하고 5명이 선거에 임한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맞대결 형태로 치러진 선거 결과 6342,828(득표율 53.2)를 얻은 박정희 후보가 5395,900(득표율 45.2)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95만여 표 차로 따돌리면서 대통령에 당선된다.








특히 제 7대 선거에서 박정희는 경상도 지역에서 김대중에 비해 3배나 되는 표를 얻었고, 김대중 역시 전라도에서 박정희 후보에 비해 2배가 넘는 표를 얻었으며, 농촌은 여당을 지지하고 도시는 야당을 지지하는 등 지역대결 득표와 여촌야도 현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결과가 나타났다.


마타도어와 지역감정


1966년 8월 20일 광주에서 신한당 전남도당의 주선으로 이름 있는 인사들을 망라한 12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 ‘전남 푸대접 시정 긴급대책위원회’를 발족 홍남순 변호사를 위원장으로 선출한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 종반에 당시 야당후보 윤보선이 전북 이리 유세에서 박정희 정권에서 호남이 푸대접을 받았다며 지난 1차 경제개발 5개년 동안 영남과 호남에 대한 투자비를 열거한다.


1969년 10월 광주에서 김대중· 윤길중 등은 호남 푸대접을 강하게 언급하면서‘경상도 정권을 타도하자’고 소리를 높이고 나섰다.


야당의 호남푸대접 주장은 바람몰이에는 성공하지만 역으로 영남권의 민심을 자극하고 영남에서는 경북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몰표를 안겨주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지역대결 외에 또 다른 특징은 마타도어가 선거의 핵심전략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마타도어는 투우사들 중에서 마지막에 소의 정수리를 찔러 죽이는 투우사(bullfighter)를 뜻하는 스페인어 Matador(마따도르)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만큼 치명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치판에서는 근거 없는 사실을 조작해 상대편을 중상모략하거나 그 내부를 교란시키기 위해 감정과 정서를 자극하고 판단력을 교란시키는 흑색선전(黑色宣傳)의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마타도어, 흑색선전, 네거티브 선거전의 원조라고 불릴만한 사람으로 인제에서 약방을 운영하던 중 1961년 인제의 민의원 보선에 출마한 김대중의 당선에 크게 기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김대중의 특급 선거참모가 된 엄창록(嚴昌錄)이라는 인물이 있다.

엄창록의 네거티브 전술은 그 방법이 다양하여

자해극 소동, 유권자의 집에 상대 후보 선거운동원이라며 돈 봉투를 건넨 뒤 다시 찾아가 잘못 전달됐다며 되돌려 받기. 상대방 이름을 붙인 차량으로 보리밭을 짓이겨 놓고 욕설하고 도망치기. 상대 후보의 유세장에 나오면 돈 봉투를 준다고 선전해놓고서 헛걸음시키기. 기분 상하게 적은 액수의 돈 봉투를 돌리며 상대 후보가 주는 것이라고 생색만 내기. 상대 후보 명의로 음식점에 많은 자리를 예약해 놓고 펑크 내기. 상대 후보 명의로 동네 두 세집에만 돈 봉투를 돌리고 온 동네에 소문내기 등 무궁무진했다.

427일 투표 시작 직전 대구 지방에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백제권 대동단결"

이런 구호가 적힌 호남향우회 명의의 유인물이 뿌려졌다.

부산에도

"호남 후보에게 몰표를 주자"

라고 적힌 구호가 전봇대 같은 곳에 나붙었다.

김대중 후보의 귀신같은 선거 참모, 선거판의 여우로 불리던 엄창록이라는 사람이 선거 막판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대편으로 넘어가 이런 일을 기획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호남 사람들 이름으로 해야 경상도 사람들이 더 분개할 것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

야당에서 뿌린 지역감정의 불씨에 기름을 쏟아 부은 마타도어 전술이자 고약한 흑색선전이다.



물론 마타도어 전술이 선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아니면 말구식의 흑색선전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최근에는 발전된 인터넷 매체의 영향력을 악용하여 일정부분을 편집하여 사실을 왜곡시키는 가짜뉴스들도 판을 치는 것을 보면, 마타도어에 대한 유권자의 올바른 판단력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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