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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선거 – 제17대 - <반복된 균열> 이회두 본부장
  • 기사등록 2017-05-09 0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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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창당

 

200377일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

920일부터 113일까지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강봉균, 김근태, 김덕배, 김명섭, 김성호, 김원기, 김태홍, 김택기, 김희선, 남궁석, 문석호, 박병석, 원혜영, 설송웅, 송석찬, 송영길, 송영진, 신계륜, 신기남, 유재건, 이강래, 이상수, 이원성, 이창복, 이해찬, 임종석, 임채정, 장영달, 정대철, 정동채, 정세균, 천용택, 홍재형, 이종걸, 천정배, 김덕규, 배기선, 유선호, 오영식, 우상호, 유기홍, 최용규,

113일에 개혁국민정당에서 탈당한 김원웅, 유시민,

 

이들 탈당한 의원들과 당원들의 참여 속에 20031111일에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밀어내고 지지율은 1위로 수직 상승한다.



2004111일 임시 전당 대회를 통해 정동영 의원이 첫 당의장에 당선되었으며 김근태 의원이 첫 원내대표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2004218일 노무현 대통령은 17대 총선을 앞두고 경인지역 6개 언론사와 가진 합동회견에서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나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라고 발언하여 특정정당 지지를 유도한다는 논란을 일으킨다.

 

2004224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대통령기자회견에서는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는 발언과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라고 발언하여 대통령이 선거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논란에 휩싸인다.

 

20043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을 위반했다고 판정하고 중립의무 준수를 요청한다.

 

200434일 만 노무현 대통령이 선관위의 결정에 납득할 수 없다고 밝히자 다음날 추미애의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발언에 긴급의원총회를 소집하고,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 및 측근비리 등 대해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지 않으면 탄핵을 발의하겠다고 선언한다.

 

새천년민주당은 또한 같은 야당인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에 탄핵안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한다.

 

청와대는 부당한 정치적 정략적인 압력이라며 사과를 거부했으며, 39일에 새천년민주당 의원 51명과 한나라당 의원 108명이 서명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었다.



탄핵안이 발의된 39일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가 흥미롭다.

 

노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이 60.6%, 사과가 필요 없다는 의견인 30.1%보다 두 배 이상 많았고, 탄핵의 경우에는 반대가 65.2%로 찬성의 30.9%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국민들은 노대통령이 편향발언과 측근 비리는 사과해야 하되, 그렇다고 탄핵까지 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움직임은 국민들의 뜻과는 정반대로 반응한다. 여전히 국민들을 바지저고리로 취급하는 행태이다.

 

2004311일 노무현 대통령은 특별 기자 회견을 열고 사과요구를 거부하면서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한 분들이 시골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노대통령이 언급한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은, 노건평에게 3000만원을 건넸다는 의혹에 대한 별다른 변명 없이 서울 한남대교 밑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2004312일 국회(임시회) 2차 본회의를 개회하여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소속 의원 등 총 195명이 193명 찬성, 2명 반대로 탄핵안이 가결되었으며, 오후 3시에는 탄핵소추결의서 정본이 헌법재판소에 송달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국민들은 사과는 바랐지만 탄핵은 가혹하다고 여겼으며, 2004415일에 열린 제17대 총선에서 실질적인 여당인 열린우리당에게 152석이라는 국회 과반수를 밀어주는 탄핵 역풍을 불어준다.

 

탄핵역풍의 여파로 박관용 국회의장,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 홍사덕 총무,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대표와 유용태 원내총무는 정계에서 물러났고,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도 총선에서 고배를 마셨으며, 새천년민주당 추미애 선대위원장도 총선에서 낙마하고 유학길을 떠난다.



2004514일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일부 위반했으나 그 위반 정도가 탄핵의 사유가 될 정도로 중대하지는 않다고 판단하고 소추안을 기각 결정하였으며 노대통령은 국정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탄핵역풍 총선으로 제1당으로 올라선 열린우리당은 이후 어수선한 행보와 난조를 보이며 무너져 간다.

 

총선 이후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의 사퇴로 신기남 의원이부영 전 의원이 차례로 의장직을 승계하였으며 5월에 새 원내대표로 선출된 천정배 의원은 연말에 사퇴하게 된다.

 

20051월 당의장에 임채정 의원, 원내대표로 정세균 의원이 당선되었으나 이후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200542일의 정기전당대회를 통해 당선된 문희상 당의장도 4월 재보궐선거, 10월 선거에서 패배하게 되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상임중앙위원들과 함께 사퇴하였다.

 

이후 열린우리당은 비상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정세균 의원이 당의장을 겸임했으나 당내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법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물리적 반대를 뚫고 국회를 통과시킴으로써 여야간의 갈등을 증폭시킨다.

 

2005728일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 개편을 전제로 총리지명권, 조각권 등을 한나라당이 행사하는 대연정을 한나라당에게 제안하였으나 거절 당한다.

 

200612일 정세균 의원이 당의장을 사퇴하고, 8일에 유재건 의원이 임시 당의장을 승계했다가, 123일 김한길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된다.

 

이 시기에 한나라당은사학법개정을 반대하며 국회 앞에서 끊임없는 시위를 추진하고 있었다.

 

2006218일 열린우리당은 임시전당대회를 개최하여 5.31 지방선거를 이끌어나갈 당의장에 정동영을, 최고위원으로 김근태, 김두관, 김혁규, 조배숙 의원을 선출한다.


그리고, 2006531일에 열린 지방선거에서 전북 한곳만 얻는 유례가 없는 최악의 참패를 당했으며, 같은 해 7월과 10월의 재보궐 선거에서도 우리당은 연패를 하면서 오히려 박근혜는 선거의 여왕이라고 불리게 된다.

 

열린우리당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에 힘입어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299석 중 152석을 기록하는 압승을 거뒀으면서도 갈팡질팡하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렇게 열린우리당은, 200311월에 가열차게 출범했지만 창당 초심을 밀고나갈 헌신적인 리더를 찾지 못한 채 끝없이 추락해 가고 있었다.

 

어쩌면 2006년에 열린우리당에도 반전의 기회가 있었다.

 

노무현이 탄핵 소추되어 대통령 권한을 상실한 혼란한 상태에서 대통령직을 대리하여 침착하게 국정을 운영한 고건이 새롭게 조명을 받으며 등장한 것이다.

 

200610월 고건의 지지율은 한나라당의 이명박, 박근혜를 뛰어넘었고, 이에 고건을 중심으로 대선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고건 대선 캠프가 설립되었다.

 

그런데 200612월 노무현 대통령이 고건 총리 기용에 대해 실패한 인사였다며 악평을 내리자, 고건은 이에 대해 대통령이 따돌림 당한 것은 오만과 독선, 무능력 탓이라며 정면 반박하면서 갈등을 빚더니, 20071월 대선불출마 선언을 하게 된다.

 

2007년에 들어서도 낮은 지지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열린우리당에서 임종인 의원을 필두로 탈당이 이어지더니 6월이 되자 152석이던 의석은 73석으로 반토막이 나버린다.

 

 

잡스러운 후보경선

 

2007820일 대통합민주신당과 열린우리당이 합당을 선언하고, 열린우리당 사수파 당원들로 구성된 열린우리당 지킴이연대는 중앙선관위를 상대로 합당수리 무효확인가처분 및 본안소송을 제기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중도개혁통합신당, 중도통합민주당 등의 이합집산을 거쳐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모여들게 된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이미 개혁파 중심의 친노무현 계파, 비노무현 계파, 친정동영 계파, 진보성향의 친김근태 계파에 친고건 계파와 광장파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822, 어지럽게 이합집산 하게 된 대통합민주신당에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손학규 전 경기지사, 이해찬 전 총리, 한명숙 전 총리,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의장, 추미애 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등이 후보로 등록한다.

 

95일 국민 여론조사 50%와 선거인단 여론조사 50%를 반영한 예비경선에 따라 정동영, 손학규,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후보가 경선 후보로 결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투표율 오류가 발생하여 논란이 되어 쟁점화 되었는데, 지지율이 비교적 높은 손학규 후보 측은 여론조사 50%를 제안했고, 정동영 후보 측은 여론조사 불가를 주장했다.

 

열린우리당은 여론조사 비율을 10%로 결정하고 제주에서 시작하여 16개 시도를 8개 권역으로 나눠 총 10일간 국민경선을 실시한다.

 

102일 정동영후보 측의 조직동원 및 관권선거 의혹으로 경선 잠정 중단 사태까지 발생하였고 109일 지역투표를 일괄적으로 치르는 경선이 재개되어 43.8%를 득표한 정동영 후보가 34%의 손학규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열린우리당의 탈당사태는 다른 정당들과 대선 후보자들을 영향을 주어 복잡하고 다양한 행보를 만들지만 대선 자체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이회창이 11월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자민련을 대신하여 충청정당으로 탄생한 국민중심당과 연계하면서 박근혜와의 연대를 시도한 것이 눈을 끄는 부분이다.

 

만일 경상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박근혜와 충청도 지원 세력을 업게 된 이회창의 연대가 실현되었다면, 여러 가지 논란에 휩싸이던 이명박이나, 호남표에 기반한 정동영에게 상당한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민주당의 경우는 언급하기도 참담할 지경으로, 조순형, 김민석, 장상, 신국환 등이 민주당에 막 입당한 피닉제 이인제에게 대선후보 자리를 넘겨주고 만다.

 

16대 대선에서 나름 상당한 구민적 지분을 획득했던 민주노동당은, NL의 지원으로 권영길이 노회찬, 심상정을 앞세운 PD에게 아슬아슬한 차이로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두 노선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내 눈을 바라봐!” 허경영이, 참민주연합의 정근모와 사회당의 금민을 제치고, 영남, 강남 등 보수정당의 지지율이 높은 곳에서 이인제를 넘긴 것을 보면 가히 주연급 조연이라 하겠다.

 

 

치열한 한나라당 경선

 

20076월 한나라당의 경선 후보 등록이 시작되자 고진화, 박근혜, 원희룔, 이명박, 홍준표가 도전장을 던진다.

 

손학규는 경기지사 퇴임 직후 민심 100일 대장정 등의 행보를 보이며 어떻게든 지지율 반등을 위해 노력했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2007319일 한나라당 탈당을 선언하고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에 참여한다.

 

여권의 자멸 속에 한나라당 경선은 곧 본선으로 여겨지며 국민들의 이목을 모은다. 특히, 성공신화 이명박과 선거신화 박근혜는 치열한 경선을 벌인다.


 

박근헤는 제17대 총선에서는 여의도에 천막당사를 차려놓고 121석을 확보하면서 두각을 내더니, 2006년의 제4회 지방선거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사상 최대의 대승을 거두었다.

 

박근혜가 선거유세 도중 괴한의 커터칼 테러를 당한 박근혜 대표가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깨어나자마자 선거 상황을 물어본 에피소드 역시 박근혜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높여 주었다.

 

이명박 후보의 경우 서울 시장 재임 중 시내버스 개선사업, 청계천 복원에 성공한데다가, 109일 기습적으로 감행한 북한 핵실험의 여파를 등에 업고 지지율 1위로 올랐고, 200612월 말에는 45.6%의 지지율을 기록하여 박근혜 후보와 고건 전 총리를 앞섰다.

 

경선이 중반에 접어들며 이명박은 친인척 관여 부동산 투기 의혹, 부인의 15차례 위장전입 의혹, BBK 관련 주가조자 의혹, X파일 존재론, 산악회 선거법 위반 논란, 도곡동 땅 문제 등이 드러나며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당시 상황을 압축하자면 천막당사를 지킨 박근혜는 당내 지지도에서 앞서 있고, 샐러리맨 신화의 이명박은 여론에서 앞서 있었다.

 

결과적으로 2007820일 경선 결과에서 이명박은, 선거인단을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432표 뒤졌으나, 박근혜 후보를 1.5% 차이인 2884표 차로 앞서며 후보로 선출된다.

 

이런 결과는 549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득표수를 5배의 투표수로 환산하는 경선 규정에 의해, 이명박 후보의 표는 16868표로 계산되고, 박근혜 후보의 표는 13984표로 계산된 덕이다.

 

박근혜의 지지자들은 경선 불복을 주장했으나 정작 박 후보는 이 날 전당대회에서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겠다며, 당원의 본분으로 돌아가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백의종군하겠다고 밝힌다.

 

박근혜는 독자출마한 이회창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영입하고자 할 때도 이명박의 SOS를 받아들여, 한나라당 잔류를 택하고 이명박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경선 승복 약속을 끝까지 지킨다.


17대 대통령선거 결과

 

각 당의 대통령후보 경선도 한나라당을 제외하면 어지럽기만 할뿐 그리 크게 주목할 만한 이슈가 없었는데, 대통령 선거전도 그다지 이슈랄 것도 없이 이명박 1인 중심의 본선이었다.

 

대통합민주신당과 정동영 후보측은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의 불리한 선거를 더 망가뜨리기라도 하듯 정책대결도 포기한 채 무조건적인 네거티브 전략, 감성전략으로 일관한다.

 

15대 대선의 향방이 TV토론에서, 16대 대선에서는 인터넷과 커뮤니티가 커다란 영향을 주었지만, 17대 대선은 TV토론의 영향은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TV 토론 참가 기준이 원내 의원 5인 이상인 정당의 후보 혹은 최근 여론조사 지지율 3% 이상 후보라서 원내 정당 후보로 이명박, 정동영, 권영길, 이인제와 지지율 3% 이상 후보로 이회창, 문국현, 6인이 참가하여 서로 얼굴 한 번 비치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선거가 끝나고 불과 4% 개표가 시작되자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알리는 이미지가 나올 정도로 제17대 대통령 선거는 싱겁게 마무리 되었다.



17대 대통령 선거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작품이라는 생각도 들게 될만큼 이명박과 정동영 두 후보의 전국의 득표 결과는 5,1 광역선거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야당에게 꼼짝없이 일방적으로 눌려버린 여당 참패는 언제나처럼 헌신적인 리더의 부재와 주인의식을 갖추기 어려운 집단의 내부 분열과 붕괴가 원인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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