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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선거 - 제10대 - <입다문 최규하> 이회두 본부장
  • 기사등록 2017-04-23 19:04:08
  • 수정 2017-04-29 16: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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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반정부 시위

19795, 야당인 신민당 당수 김영삼이, 노동현장의 고통을 알리고자 위장폐업에 맞서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하던 YH 사건에 개입하는 등 적극적인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자 박정희 정권은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을 동원하여 10월에 국회에서 김영삼을 제명하였다.


▲ <신민당사로 진입한 경찰들에게 끌려 나오는 여공들과 김영삼 총재>


이 사건으로 국내외 여론의 지탄이 더욱 높아지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1015일부터 유신철폐와 야당탄압 중지를 외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정부는 1018일부터 이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와 장갑차를 출동시켜 시위를 강제 진압했으나 대규모 저항운동은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궁정동의 총소리

이에 대한 처리를 두고 중앙정보부부장 김재규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이 각각 온건과 강경으로 맞선 가운데 10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총격 살해하며 이른바 궁정동의 총소리와 함께 유신체제가 끝나게 된다.

그날부터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사령관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되고 합동수사위원장으로 전두환이 임명된다. 그 후 김재규는 11월부터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이듬해 19805월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79113일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이 치러지고 이어 1111일 대통령 권한대행인 최규하 국무총리는

유신헌법상 대통령 선출 시한인 1980125일까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0대 대통령을 선출하고 새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잔여 임기인 5년을 채우지 않고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개헌하여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시국 담화를 발표한다.

하지만 공화당에서 김종필 총재를 추대하기로 하자 당황한 신현확 부총리, 구자춘 내무장관 그리고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등이 공화당 인사들과 접촉하고, 1117일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가 여야 영수회담을 통해 평화적 정권교체의 기틀 마련에 상호협력하기로 하면서 최규하 국무총리가 단일 대통령 후보로 등록한다.

10대 대통령 최규하 당선

최규하 후보는 1979126일 장충체육관에서 진행된 제10대 대통령선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재적의원 2,560명 중 2,549명이 출석한 가운데 2,465(기권 11, 무효 84)를 얻어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1227일 취임한다.

취임 후 최규하 대통령은 각계 원로와 중진으로 국정자문회의를 구성하고 전직 대통령인 윤보선이 의장으로 피선하고 김대중 등 재야인사 687명을 복권하는 등 시국의 안정과 화합을 위한 역할을 시작하고자 한다.




12.12반란사태와 신군부의 출현

최규하가 대통령에 당선된 며칠 후 19791212일 하나회라는 군부 내의 사조직을 주축으로 하는 이른 바 신군부의 정권 탈취 반란사태가 벌어진다.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사조직인 하나회멤버들인 9사단장 노태우, 수경사 33단장 김진영 등과, 하나회를 후원하고 이날 반란에 동조한 1군단장 황영시(후에 육군참모총장, 감사원장 역임),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후에 안기부장, 국회의원 역임) 등을 등에 업고, 역시 하나회 멤버인 수경사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것이다.

12일 밤늦게 반란 소식을 접한 수경사령관 장태완 장군은 반란군 전두환 일당을 잡으러 사령부에 주둔한 탱크와 33경비단 병력을 경복궁으로 출동시켰으나 김진영 33단장에 의해 회군 당한다.

이날 12.12 반란사태는 신군부가 밤늦게 수경사, 특전사, 그리고 육군본부를 완전 장악하면서 반란 성공으로 상황이 종료되었다.

33 단장인 김진영은 그 후 신군부 아래서 승승장구 출세 길을 걷는 반면, 전두환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한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반란에 참여한 부하들에 의해 체포되는 하극상을 당했고, 정승화와 함께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한다.

이들은 민주화 이후 복권되었으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1989년 자살로 추정되는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아무튼 12.12 반란의 성공으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면서 합동수사위원장이자, 법적으로 금지된 것을 무시하고 중앙정보부장까지 겸임하며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좌지우지하게 된다.

전두환의 등장은, 승냥이 가자 늑대가 온 꼴이랄지 하나회라는 하이에나 집단이 이 나라를 유린하고 떵떵거리며 군림하게 하여 5공화국을 집단 독재 시절로 만들게 된다.


최규하의 침묵

최규하 전 대통령은,

이승만이 대통령 시절인

1948년 농림부 양정과장,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 1952~57년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9~60년 외무부 차관을 지냈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대통령 시절인

1963년 말레이시아 대사, 1967~71년 외무부 장관, 1971~75년 청와대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197512월부터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1976313일 국회 동의를 거쳐 총리가 되었다.

197910,26사태 이후 126일에는 제 10대 대통령이 되었다.

요약해 보면 최규하 전 대통령은, 이승만 정부 때의 한일회담 실무에도 참여했고 박정희 정부의 베트남전 참전과 관련해 한미회담 실무를 맡았으며, 무엇보다 신군부의 계엄 확대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립을 결정한 국무회의 등의 최종 서명을 한 장본인이다.

다시 말해 최규하는 19791026일에서 1980816일까지의 진실을 알고 있을 가장 책임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박정희 정부와 미국 사이 베트남 전쟁 협상의 실체,

19791212일 저녁 630분에서 1213일 새벽 5시경까지의 12.12 사태의 법률적 명분을 세워준 것에 대한 진실,

1980816일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이유 등

국민들의 궁금증에 대해 어떤 증언이나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로 2006년 공교롭게도 궁정동 총소리가 울린 날과 같은 날짜인 1026일 세상을 등지고 만다.

1026일은 우리 역사의 격변을 일으킨 인물과 지켜본 인물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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